금융

퇴직연금 500조 시대의 맹점… ‘얼마나 불렸나’에 가려진 ‘언제 꺼낼까’

서강대
이수민 서강대 · 프렌즈 1기
2026.09.13

● 9월부터 DC·IRP서 10·20년물 개인투자용 국채 매입

501조4000억원. 2025년 말 국내 퇴직연금에 쌓인 돈이다. 전년 말보다 16.8% 늘며 처음 500조원을 넘어섰다. 그동안 퇴직연금을 둘러싼 관심이 ‘얼마나 쌓였고 얼마나 수익을 냈는가’에 집중됐다면, 적립금이 500조원을 넘어선 지금은 또 다른 질문도 중요해지고 있다. 은퇴한 뒤 이 돈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 꺼내 쓸 것인가다.

이달부터 확정기여형(DC)과 개인형퇴직연금(IRP) 계좌에 들어온 개인투자용 국채가 주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DC·IRP 가입자는 9월부터 10년물과 20년물 개인투자용 국채를 직접 매입할 수 있다. 2026년 9월 발행분의 만기 적용금리는 10년물 연 4.765%, 20년물 연 4.920%다. 만기까지 보유하면 표면금리에 가산금리를 더한 금리를 기준으로 연복리가 적용된다.

하지만 이 제도의 의미를 ‘4%대 후반의 금리를 주는 새 투자상품’으로만 보면 절반만 보는 셈이다. 10년 뒤, 20년 뒤 필요한 자금의 시점에 맞춰 만기를 배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개인투자용 국채는 퇴직연금을 자산을 불리는 계좌역할을 넘어, 미래 생활비까지 설계하는 계좌로 확장할 수 있는 수단에 가깝다.

퇴직연금, 이제 언제 꺼낼까
퇴직연금, 이제 언제 꺼낼까

● 501조원 모였지만…퇴직연금은 ‘적립’에서 끝나지 않는다

2025년 말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 가운데 실적배당형 상품 비중은 24.6%로 3년 만에 두 배로 늘었다. 가입자가 직접 운용하는 DC와 IRP도 전체 적립금의 54.3%를 차지했다. ETF 투자액은 48조7000억원으로 실적배당형 자산의 약 40%까지 커졌다. 퇴직연금에서도 예금에만 돈을 묶어두기보다 직접 상품을 선택해 수익률을 높이려는 움직임이 뚜렷해진 것이다.

실제 지난해 퇴직연금 전체 수익률은 6.5%로 제도 도입 이후 가장 높았다. 다만 퇴직연금의 목적은 높은 수익률 자체에 있지 않다. 근로기간 동안 쌓은 자산을 은퇴 이후 소득으로 전환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다.

이 지점에서 일반 투자계좌와 퇴직연금의 차이가 생긴다. 30~40대에는 투자자산을 얼마나 키우는지가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은퇴가 가까워지면 자산의 총액 못지않게 ‘어느 해에 얼마의 현금이 필요한가’와 같이 자산관리의 중요성이 커진다. 월급이 사라진 뒤에도 주거비와 생활비는 매달 발생하기 때문이다.

특히 은퇴 직후 증시가 크게 하락하면 문제가 커질 수 있다.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가격이 떨어진 주식이나 주식형 펀드를 팔 경우, 이후 시장이 회복되더라도 회복에 참여할 자산 자체가 줄어든다. 은퇴 이후에는 높은 평균수익률뿐 아니라 필요한 시기에 자산을 팔지 않아도 되는 구조를 만드는 것도 자산배분의 한 부분이 되는 이유다.

● 국채의 역할은 주식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날짜’를 맞추는 것

개인투자용 국채는 정부가 개인의 장기 자산 형성을 위해 발행하는 저축성 국채다. 일반 국고채처럼 시장에서 자유롭게 사고팔며 가격 차익을 얻는 방식이 아니라, 청약을 통해 매입하고 만기에 원금과 이자를 일괄 지급받는 구조다. 만기 보유 시 표면금리에 매월 결정되는 가산금리를 더해 연복리를 적용한다.

9월 발행분의 경우 10년물은 연 4.765%, 20년물은 연 4.920%가 복리 계산에 적용된다. 1억원을 만기까지 보유한다고 가정하면 10년 뒤 세전 약 1억5928만원, 20년 뒤 약 2억6132만원이 된다. 세전 누적수익률로는 각각 약 59.3%, 161.3%다.

20년물의 ‘161.3%’만 보면 높은 수익률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주의해야할 점은 이 수치는 20년에 걸쳐 쌓인 누적수익률이라는 점이다. 이를 20으로 나눠 연 8%대 상품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실제 매년 복리 계산에 사용되는 금리는 연 4.920%다.

더 중요한 것은 수익률보다 만기다. 예를 들어 60세부터 69세까지 해마다 일정 규모의 생활비가 필요하다면, 각각의 국채 만기가 60세, 61세, 62세에 차례로 돌아오도록 자산을 배치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주가가 좋은지 나쁜지와 무관하게 특정 연도에 사용할 돈의 일부를 미리 정해두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투자용 국채를 주식형 ETF와 놓고 어느 쪽이 더 높은 수익을 내느냐만 비교하면 상품의 기능을 놓치기 쉽다. 주식형 자산이 장기간 자산을 성장시키는 역할을 한다면, 만기가 정해진 국채는 미래의 특정 지출 시점과 자산 회수 시점을 맞추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퇴직연금의 역할 분담
퇴직연금의 역할 분담 <재정경제부 자료>

● 채권 사다리의 핵심은 수익률이 아니라 ‘은퇴 후 시간표’

이런 기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채권 사다리’ 전략이다. 자금을 한 번에 같은 만기의 채권에 넣는 대신 여러 시점에 나눠 매입해 만기가 차례로 돌아오도록 만드는 방식이다.

매경플러스 측에서 미래에셋증권에 의뢰한 시뮬레이션에서는 2026년부터 2035년까지 10년물 개인투자용 국채에 매년 3000만원씩 총 3억원을 넣는 사례를 제시했다. 2026년에 산 국채는 2036년, 2027년에 산 국채는 2037년에 만기를 맞는 식이다. 2026년 9월의 금리가 향후에도 같다고 가정하면 2036년부터 2045년까지 매년 약 4778만원의 만기 원리금이 순차적으로 돌아온다는 계산이다.

이를 월 단위로 환산하면 약 398만원이다. 다만 실제 상품이 매달 398만원을 지급하는 것은 아니다. 매년 한 번 매입했다면 만기 역시 해마다 한 차례 돌아온다.

채권 사다리는 투자자가 은퇴 후 필요한 돈의 시간표를 먼저 그리고 여기에 자산의 만기를 맞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투자할 상품을 먼저 고른 뒤 수익률을 계산하는 방식과는 순서가 반대다. 개인투자용 국채는 ‘언제 돈이 필요한가’를 먼저 정하고 미래 10년의 현금흐름을 연결하는 구조로서 기능한다.

10년 적립 후 다음 10년의 현금흐름
10년 적립 후 다음 10년의 현금흐름

● 확정금리의 대가는 ‘선택권’… 20년 뒤 구매력까지 고정되지는 않는다

미래 현금흐름을 예측하기 쉬워지는 대신 투자자가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다. 가장 큰 것은 유동성이다. 개인투자용 국채는 일반 채권처럼 시장에서 자유롭게 매도할 수 없다. 매입 1년 뒤부터 중도환매를 신청할 수 있지만 만기 전에 돈을 찾으면 가산금리와 복리 혜택을 받지 못하고 표면금리의 단리 이자만 적용된다.

장기간 금리가 고정되는 것도 양면성이 있다. 앞으로 시장금리가 하락한다면 현재의 4%대 후반 금리를 오랜 기간 확보한 효과가 커진다. 반대로 향후 금리가 크게 오른다면 더 높은 금리의 상품이 새로 나와도 기존 자금은 과거 금리에 묶여 있다. 확정금리는 미래 수익의 예측 가능성을 얻는 대신 향후 더 나은 조건을 선택할 가능성 일부를 포기하는 구조인 셈이다.

물가도 변수다. 만기 때 받을 명목금액은 계산할 수 있지만,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상품과 서비스의 양까지 지금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향후 물가상승률이 예상보다 높다면 10년 또는 20년 뒤 원리금의 실질 구매력은 낮아질 수 있다.

은퇴까지 시간이 많이 남은 20~30대와 은퇴를 몇 년 앞둔 가입자에게 같은 자산배분이 적합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전자는 장기간의 가격 변동을 감수하며 성장자산을 운용할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지만, 후자는 가까운 시점에 사용할 생활비의 안정성도 함께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확정금리의 반대편엔 유동성이 있다
확정금리의 반대편엔 ‘유동성’이 있다 <재정경제부 자료>

● 퇴직연금 500조원의 시대, 다음 질문은 ‘어떻게 꺼내 쓸 것인가’

DC와 IRP는 위험자산을 가입자별 적립금의 최대 70%까지 운용할 수 있다. 나머지 자산을 반드시 예금으로 둘 필요는 없다. 개인투자용 국채가 퇴직연금에 들어오면서 장기 국채 역시 자산배분에 활용할 수 있는 선택지로 추가됐다.

그렇다고 개인투자용 국채가 기존 예금이나 주식형 상품을 대체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이번 제도의 의미는 퇴직연금 안에서도 자산마다 다른 역할을 부여할 수 있는 여지가 넓어졌다는 데 있다. 장기 성장에 사용할 돈과 몇 년 뒤 반드시 필요한 돈을 구분하고, 후자의 시점에 만기를 맞추는 식이다.

퇴직연금 시장은 이미 500조원을 넘어섰다. 앞으로는 적립금 증가율이나 한 해 수익률뿐 아니라 가입자들이 쌓아놓은 자산을 은퇴 후 소득으로 얼마나 안정적으로 전환하는지도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개인투자용 국채가 그 과정에서 실제로 어떤 역할을 할지는 앞으로 나올 청약 규모와 DC·IRP 편입 비중, 중도환매 규모를 통해 확인될 것이다.

퇴직연금의 다음 경쟁은 ‘얼마나 많이 벌었는가’만이 아니라 ‘필요한 순간에 얼마를 꺼낼 수 있는가’에서 갈릴 수 있다.

[매경플러스 프렌즈 1기=서강대 이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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