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싼 곳에서 물건을 만들어 전 세계로 자유롭게 파는 시대, 이른바 '자유무역'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 요즘 국제 뉴스에서 가장 자주 보이는 단어는 단연 '보조금'과 '공급망'이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세계 주요국들이 자국 산업을 지키고 첨단 기술을 독점하기 위해 막대한 돈(보조금)을 뿌리는 '공급망 내쇼날리즘(자국 중심주의)'이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던 자유로운 무역 시대는 끝나고, 막대한 자금력을 앞세운 각자도생의 보조금 전쟁터가 열린 셈이다.
[효율성에서 안보로] "돈 줄 테니 우리 땅에 지어라", 달라진 무역의 법칙
과거의 무역이 '어디서 만들어야 생산 비용이 제일 적게 들까?'를 고민했다면, 지금은 '어느 나라에서 만들어야 보조금을 받고 안전할까?'를 고민한다. 거대 경제권들은 반도체, 배터리 같은 핵심 첨단 제품을 자국이나 친한 우방국 땅에서만 만들도록 천문학적인 보조금을 내걸고 있다. 비유하자면, 예전에는 해외에서 싸게 사 오던 장바구니 물품들을 이제는 "우리 동네 마트에서 산 것만 세금 혜택과 보조금을 주겠다"며 다른 나라 제품에 불이익을 주는 격이다. 무역의 기준이 '가격 경쟁력'에서 '보조금과 자국 이익'으로 완벽히 바뀐 것이다.
[동상이몽의 통상 현장] '보조금 장벽'에 걸린 기업들의 눈치 싸움
문제는 이러한 보조금 전쟁이 전 세계 기업들에게 커다란 불확실성을 안겨주고 있다는 점이다. 특정 국가에 공장을 지으면 엄청난 보조금을 받지만, 그 대신 다른 국가와의 거래가 제한되거나 엄격한 조건이 붙는 등 외통수에 걸리기 일쑤다. 다 함께 지키기로 했던 세계무역기구(WTO)의 약속은 힘을 잃었고, 거대 강국들은 보조금과 수입 규제를 무기로 제멋대로 규칙을 바꾸고 있다. 규칙이 사라지고 돈과 힘이 지배하는 통상 환경은 수출로 먹고사는 국가들과 기업들에게 엄청난 부담이 되고 있다.
[위기와 대응 전략] '수동적 방어'를 넘어 '기술 주도권' 확보해야…
공장과 자원이 부족하지만 뛰어난 기술력으로 물건을 만들어 팔던 대한민국에게 이러한 흐름은 직격탄이다. 강대국들이 "우리 땅에 공장을 짓고 보조금을 받거나, 아니면 시장에서 소외되라"며 선택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한국 통상이 가야 할 길은 명확하다. 단순히 상대의 보조금 장벽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방어'를 넘어, 적극적으로 판을 새로 짜는 '전략'이 필요하다. 특정 국가에 지나치게 의존하던 공급망을 다변화하고, 보조금 경쟁을 넘어서는 대체 불가능한 기술력을 가져야만 거대 강국들 사이에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향후 과제와 제언] 거친 보조금 파도 속, 새로운 통상 리더십을 향해
자유무역이라는 편안한 배가 가라앉고, 보조금을 무기로 한 보호무역주의라는 거친 파도가 밀려오는 지금, 글로벌 통상 질서는 거대하게 재편되고 있다. 이 혼란의 시기에 한국은 거대 강국들의 보조금 싸움에 휘둘리는 피해자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판도를 발 빠르게 읽고 활용하는 스마트한 국가가 될 것인가. 단단한 초격차 기술력과 민첩한 통상 외교 전략으로 무장할 때, 한국은 글로벌 공급망 전쟁이라는 파도를 넘어 세계 통상 무대의 새로운 리더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매경플러스 프렌즈 1기=명지대 이수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