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13억 로또 당첨되고도 출근하는 이유… 청년 세대가 열망하는 '존엄한 노동'

연세대
전영은 연세대 · 프렌즈 1기
2026.09.15
드라마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 스틸컷
드라마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 스틸컷 <CJ ENM>

세후 13억 원의 로또 1등 당첨금을 손에 쥐고도 평소처럼 상사의 눈치를 보며 출근길 지하철에 오르는 남자. 드라마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의 주인공 공은태의 모습이다. "서울 아파트 한 채 사면 끝나는 돈으로 평생 놀 순 없다"며 퇴사 대신 출근을 택한 그는, 언제든 털고 회사를 나갈 수 있는 '마음의 보험'을 품자 이전과 완전히 다른 회사원으로 거듭난다. 억울한 사내 정치에 비굴하게 굴지 않고, 무례한 갑질에 유연하면서도 당당하게 일침을 날리는 그의 '사이다' 행보에 시청자들은 열광하고 있다.

이처럼 최근 웹툰과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오피스 드라마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를 비롯해 《신입사원 강회장》, 《최애의 사원》 등이 2030 세대 사이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가장 현실적이고 팍팍한 공간인 '회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에 시청자들이 이토록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드라마 미생 스틸컷
드라마 《미생》 스틸컷 <CJ ENM>

● '생계형 근로'에서 '선택적 근로'로의 열망 : 〈미생〉이 남긴 잔상과 현재

과거 대한민국 오피스 드라마의 대명사였던 《미생》(2014)은 회사원들의 처절한 생존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바둑판을 벗어나 현실에 던져진 장그래와 원인터내셔널의 직장인들은 "그래도 살아야 한다"며 시련을 견뎠다. 비정규직의 서러움, 불합리한 업무 지시, 부당한 평가 앞에서도 직장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반격은 견디고 버텨서 '완생'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10여 년 전의 대중은 이 서글픈 리얼리즘에 깊이 공감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12년이 지난 지금, 청년 세대는 더 이상 눈물겨운 '버티기'의 패러다임을 수용하지 않는다. 《미생》의 장그래에게 회사가 생존을 위해 반드시 붙들어야 하는 '생계의 수단'이었다면,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의 공은태에게 회사는 언제든 손을 털고 나갈 수 있는 '선택의 영역'이다. 13억 원의 당첨금은 상사의 억지나 사내 정치를 거절할 수 있는 강력한 안전장치가 되어준다.

을(乙)의 비굴함을 벗겨내는 이 경제적 자립감은 역설적으로 업무에 대한 주도권과 당당함을 가져다준다. 과거 《미생》의 장그래가 부당함 속에서도 버텼던 유일한 이유가 '생계형 근로'의 굴레였다면, 오늘날 청년들이 갈망하는 것은 거절할 권리가 뒷받침된 '주도적·선택적 근로'로 변화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드라마 신입사원 강회장 스틸컷
드라마 《신입사원 강회장》 스틸컷 <JTBC>

● 부조리한 조직 문화를 향한 일침

현실의 직장인들은 여전히 상명하복식 관료주의와 연차 순으로 권력이 배분되는 조직 구조 앞에서 깊은 무력감을 느낀다. 개인이 아무리 뛰어난 역량을 갖추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해도, 사내 정치와 기득권의 벽, 그리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는 식의 꼰대 문화에 막히기 십상이다. 《신입사원 강회장》은 바로 이 지독한 조직적 한계와 답답함을 극단적인 판타지 설정을 통해 화끈하게 해소한다.

사고로 인해 20대 신입사원의 몸에 영혼이 들어간 70대 창업주 강회장은 조직의 가장 밑바닥인 말단 직원의 시선으로 사내 비리와 무능한 관리자들의 갑질을 직관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노련한 경영 경험과 한 기업의 회장으로서의 통찰을 바탕으로 사내 악습을 단칼에 처단해 나간다. 라인을 타야만 승진하는 부조리한 평가 시스템을 깨부수고, 실적을 스틸하던 부장의 빌런 행태를 사이다처럼 고발하며, 위계질서 뒤에 숨은 무능을 과감히 단죄하는 서사는 시청자들에게 통쾌함을 제공한다.

이러한 '초월적 해결사'에 대중이 열광하는 현상은 역설적으로 현실 일터의 공정성에 대한 극심한 갈증을 보여준다. 청년 직장인들이 진정 바라는 것은 사내 정치나 비합리적인 세력 싸움이 아닌, 오직 '정당한 노력과 실력'으로 평가받는 공정한 조직구조이다. 개별 직원의 존엄성과 가치가 존중받는 일터에 대한 열망이 드라마 속 강회장의 일침을 통해 대리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 스틸컷
드라마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 스틸컷 <CJ ENM>

● 우리는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 게 아니다

드라마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와 《신입사원 강회장》이 보여주는 가장 역설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공통점은 바로 주인공들에게 엄청난 재력(13억 원의 당첨금)과 절대적 권력(대기업 회장)이 있음에도 결코 '퇴사'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통의 관념대로라면 인생 역전의 기회를 잡았을 때 일터를 즉시 떠나는 것이 당연한 수순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매일 아침 당당하게 출근길 지하철에 몸을 실어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이는 대중이 이 오피스 판타지에 열광하는 이유가 단순히 '노동 자체를 거부하고 불로소득으로 놀고먹기 위함'이 아님을 증명한다. 직장인들이 진짜 갈구하는 것은 노동의 종말이 아니라, 경제적 자율성과 조직의 공정성이 확보된 상태에서 '존엄한 노동의 주체'로 일하는 경험이다. '언제든 관둘 수 있다'는 경제적 안전장치와 '부당함에 굴복하지 않는' 주도성이 함께할 때, 노동은 비굴한 생계 유지 수단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하는 수단으로 탈바꿈한다.

과거 《미생》이 눈물겨운 참을성과 '존버'로 대변되는 버티기의 시대를 그렸다면, 지금의 청년들은 당당한 거절과 주도권이 보장된 새로운 오피스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통쾌한 사이다 서사의 뒤편에 숨은 청년들의 진짜 목소리는 명확하다. 자율성과 수평적 소통, 그리고 정당한 보상 시스템이라는 현실적 안전판이 구축될 때, 비로소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노동 문화가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매경플러스 프렌즈 1기=연세대 전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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