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렷한 물감 배경
가면을 쓴 아이들, 모든 생물들이 검은색과 붉은색으로만 이루어진 모습
작품의 대부분이 물로 가득하다
이기훈 내일의 낙원 원화전의 그림은 위와 같이 이루어져 있다. 디스토피아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삭막하지만 형형한 존재감의 오일파스텔 원화.
딱 봐도 강렬한 느낌을 풍기는 그의 그림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원화전에 직접 다녀왔다.
원화전은 ‘내일의 낙원’이라는 이름 아래 여러 가지 챕터로 이루어진다. <반복되는 이야기>에서는 아이들이 제각기 동물 가면을 쓴 채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으로 원화전을 시작한다. 그리고 홍수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무언가를 갈무리하는 아이들은 여러 개의 챕터를 거쳐 최종적으로 무언가를 만나기 위해 나아간다.
<가면 쓴 아이들>에서 <이어지는 밧줄>은 가면을 쓴 아이들이 각자 우산을, 튜브를, 가방을 들고 차오르는 물 속을 나아가는 내용을 다룬다. 이들은 나아가는 와중 마주친 생명체들에 밧줄을 묶어 생명과 생명을 연결하고, 밧줄을 걸치기 어려울 정도로 큰 고래 같은 생명체들을 보면 모여들어 직접 두 손과 몸으로 고래를 나른다. 이 과정에서 죽은 물고기들을 품에 안고 있는, 가면놀이-피에타가 여러 작품 등장하기도 한다.
이어서 <피어오르는 불씨>에서는 아이들이 각자의 불을 들고 홍수 속을 나아간다. 신화 속 불을 훔친 인간인 프로메테우스의 이름을 달고 그려진 작품들은 악어, 소 등 다양한 가면의 아이들이 각기 다른 화폭에서 빛을 들고, 다른 아이들과 동물들이 그 뒤를 따르는 것을 섬세하고 묵묵하게 그려냈다.
<세상의 끝자락>에서는 아이들과 생명들이 함께 힘을 합쳐 다른 생명들을 돕고, 물건을 날라 그들만의 방주를 짓는 데에 성공한다. 그리고 방주를 설치한 끝에 아이들이 도달한 곳은 완전한 경외감을 주는 대상이 있는 곳. 이름을 명확히 규명할 수도 없는,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압도적 경외감을 이기훈 작가는 <누미노제> 챕터를 통해 드러냈다.
전시에서는 챕터에 맞게 작품들의 순서를 재구성해 보여줄 뿐 아니라, 이기훈 작가가 전시장 현장에서 새로운 ‘가면놀이’ 작품을 그려낸 영상과 그의 인터뷰를 함께 전시했다. 인터뷰 속 그는 오일파스텔과 아크릴이 자신의 ‘놀이’에 적합한 도구라는 사실을 직접 발견했으며, 지금 이어가는 가면놀이 그림에 이어 1년 뒤, 2년 뒤, 5년 뒤, 더 지나 자신의 임종 직전에 그릴 그림에 대해 늘 궁금해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그의 고향이자 현재 지내는 제천은 국립공원을 비롯해 오르기 좋은 산들이 많은데, 이 산들에서는 일상에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광활한 구름과 마주한다고 한다. 그 순간 작가는 익숙한 현실이 낯설어지고, 매혹과 두려움을 내포한 경이감을 통해 초월적 세계로 진입한다. 이처럼 가면놀이 속 아이들은 종종 하늘을 올려다보며 인간 중심의 질서로 환원되지 않는 광활한 세계와 생명의 감각, 즉 <누미노제>를 느낀다고 한다.
이기훈은 현대 사회의 단면을 신화적 상상력을 가미해 재해석하며, 압도적인 질감의 화폭을 만들어낸다. 그가 그린 그림을 가까이서 보면 아크릴이 쌓은 흔적과 그 위로 오일파스텔이 칠해진 두께감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다. 그리는 획마다 무조건적으로 작은 여백이 생길 수밖에 없는 오일파스텔의 질감 특성상, 그의 ‘가면놀이’는 마치 빛바랜 추억 같기도, 흐릿한 미래 같기도 한 느낌을 준다.
원화전 이름이 ‘내일의 낙원’이니만큼 그는 무너진 세계를 그리면서도 홍수 속을 묵묵히 나아가는 아이들의 재건을 그렸다.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홍수는 정보의 홍수일 수도, 혐오의 홍수일 수도, 터전을 무너트리는 홍수일 수도 있다. 그는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과 강렬한 인상의 그림 속에서도 작은 희망과 가능성을 빼곡하게 새겨넣었고, 이는 감상자로 하여금 내일의 생명과 경이로움에 대한 사고에 빠지게 한다.
[매경플러스 프렌즈 1기=서울대 이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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