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간 직장생활을 한 기호는 은퇴 후 다시 출근한다. 이번 직함은 임원도 부장도 아닌 ‘인턴’이다. 지난 9월 16일 개봉한 영화 ‘인턴’에서 최민식이 연기한 기호의 이야기다. 2015년 로버트 드니로·앤 해서웨이 주연의 동명 할리우드 영화를 한국 상황에 맞게 리메이크한 이 작품은 개봉 첫날 6만1038명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고, 첫 주말에도 27만5000여 명을 모아 정상을 지켰다.
영화 속 ‘실버 인턴’은 극적인 설정이지만 은퇴 뒤 다시 일터를 찾는 모습 자체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국가데이터처가 지난 8월 발표한 ‘2026년 5월 경제활동인구조사 고령층 부가조사’에 따르면 55~79세 가운데 앞으로도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1178만2000명으로 전체의 69.2%였다. 이들이 희망하는 근로 연령은 평균 73.6세까지 올라갔다. 같은 조사에서 55~79세 취업자는 1012만5000명으로 처음 1000만명을 넘어섰다.
● 가장 오래 다닌 직장은 평균 53세에 떠났다
‘73.6세까지 일하고 싶다’는 수치가 눈에 띄는 이유는 기존 직장에서의 이탈 시점과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2026년 조사에서 취업 경험이 있는 55~79세 가운데 가장 오래 근무한 일자리를 이미 그만둔 사람은 69.5%였다. 이들이 해당 일자리를 떠났을 당시 평균 연령은 53.0세였다. 가장 오래 일한 직장의 평균 근속기간은 17년 7.1개월이었다.
53.0세는 경제활동을 완전히 끝낸 나이를 뜻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다닌 ‘주된 일자리’를 그만둔 시점의 평균 연령이다. 이후 다른 직장에 재취업하거나 새로운 형태의 일을 이어갈 수 있다. 같은 조사에서 장래에도 일하고 싶다고 답한 사람들의 평균 희망 근로 연령이 73.6세였다는 점을 보면, 주된 직장을 떠난 뒤에도 상당 기간 일을 계속하려는 수요가 존재하는 셈이다.
그 사이를 채우는 일의 형태도 달라지고 있다. 퇴직 후 다른 기업에 다시 정규직으로 입사하는 것뿐 아니라 계약직과 일경험, 시간제 근무, 프로젝트 참여처럼 경력을 활용하는 방식이 다양해지는 모습이다.
● 현실의 ‘인턴’은 막내 대신 30년 경력을 판다
퇴직자의 재취업 방식 가운데 눈에 띄는 사례는 오랜 경력을 특정 프로젝트에 활용하는 형태다. 매경플러스가 지난 2일 소개한 A씨는 글로벌 자동차 회사에서 30년, 미국 시장에서만 10년간 근무하며 자동차부품 해외영업 경험을 쌓았다. 퇴직 뒤 한 자동차부품 생산기업의 해외 판로 개척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정규직으로 다시 취업한 것이 아니라 6개월간 일주일에 한 번꼴로 일하는 조건이었다. 보수는 총 2400만원이었다.
기업 입장에서도 활용 방식은 다르다. 해외영업이나 재무, 정보기술처럼 특정 분야의 경험이 필요하지만 해당 인력을 상근직으로 계속 고용할 필요는 없는 경우가 있다. 이때 퇴직자의 수십 년 경력을 일정 기간 프로젝트에 투입하면 기업은 필요한 전문성을 확보하고, 퇴직자는 기존 경력을 새로운 소득으로 연결할 수 있다.
다만 A씨의 사례는 전문성이 높은 퇴직자 한 명의 사례다. 6개월에 2400만원이라는 보수를 전체 중장년 재취업자의 일반적인 소득 수준으로 확대해서는 안 된다. 수행 업무와 투입 시간, 책임, 전문성이 프로젝트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인턴처럼 모두가 퇴직 후 자신의 경력을 그대로 인정받으며 새로운 직장을 얻는 것도 아니다.
● 다시 일하는 이유, ‘제2의 인생’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중장년의 재취업을 새로운 도전이나 자아실현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2026년 조사에서 장래에도 일하고 싶다고 답한 55~79세 가운데 53.4%가 ‘생활비에 보탬’을 이유로 꼽았다. ‘일하는 즐거움’은 36.7%였다. 다시 일하는 사람들에게 생계와 자아실현이라는 두 동기가 함께 존재한다는 의미다.
연금만으로 생활을 이어가기 쉽지 않은 경우도 있다. 같은 조사에서 지난 1년 동안 연금을 받은 55~79세는 896만9000명으로 전체의 52.7%였으며, 연금 수령자의 월평균 수령액은 88만원이었다. 다만 이 수치는 개인별 연금 수령액을 집계한 것으로 가구의 전체 소득이나 자산 규모를 나타내는 지표는 아니다.
퇴직 이후의 일자리를 논할 때 ‘얼마나 오래 일하느냐’만큼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거 경력과 관계없는 저임금 일자리로 이동하는 것과 기존 경험을 활용해 새로운 직무로 전환하는 것은 같은 ‘재취업’으로 묶이지만 일의 질과 소득은 크게 다를 수 있다.
● 정부도 ‘재취업’보다 ‘경력전환’에 초점
정부 정책에도 이런 변화가 반영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2025년부터 ‘중장년 경력지원제’를 시행하고 있다. 기존 업무에서 퇴직한 뒤 새로운 분야로 옮기려는 중장년에게 실제 기업에서 1~3개월 동안 일해 볼 기회를 제공하는 사업이다.
2025년에는 1720명이 이 사업을 통해 현장 경험을 쌓았고, 정부는 2026년 지원 규모를 2000명으로 확대했다. 참여 대상은 주된 업무에서 퇴직한 뒤 경력전환을 위해 관련 자격을 취득하거나 직업훈련을 이수한 50대 중장년이다. 참여자는 월 최대 150만원의 참여수당을 받을 수 있다.
영화 속 기호처럼 기존 경력을 그대로 들고 새로운 조직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지만, 완전히 다른 직무를 다시 배우는 사람도 있다는 얘기다. 고용노동부가 공개한 사례 가운데에는 외국계 기업 사무직에서 퇴직한 뒤 전기차 충전 인프라 관리사 자격을 취득하고 관련 기업에서 실무 경험을 쌓아 재취업한 경우도 있다.
● ‘몇 살까지 일하나’에서 ‘어떤 두 번째 일을 얻나’로
한국판 ‘인턴’에서 은퇴는 직장생활의 마침표가 아니다. 현실에서도 55~79세 취업자는 1000만명을 넘어섰고, 10명 중 7명가량은 앞으로도 일을 원한다. 다만 현실의 두 번째 출근은 영화보다 복잡하다. 누군가는 생활비 때문에 일터를 떠나지 못하고, 누군가는 새로운 직업을 배우며, 일부 고경력자는 수십 년간 쌓은 경험을 프로젝트 단위로 활용한다.
앞으로 확인해야 할 것은 고령층 취업자 수 자체보다 퇴직 이후 어떤 일자리로 이동하고 있는지다. 2026년 확대된 중장년 경력지원제가 실제 취업으로 얼마나 연결되는지, 기존 경력을 활용하는 프로젝트형 일자리가 일부 고숙련 인력 밖으로도 넓어지는지, 재취업 이후 임금과 근로시간은 어떻게 달라지는지가 다음 지표가 될 수 있다.
영화 ‘인턴’의 현실판이 늘어난다면 그 성패는 다시 출근하는 사람의 숫자가 아니라, 첫 번째 직장에서 쌓은 경험이 두 번째 일자리에서도 얼마나 이어지는지에 달려 있다.
[매경플러스 프렌즈 1기=서강대 이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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