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은 언제나 승리한 사람의 모습으로 기억된다.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오디세우스 역시 뛰어난 전략가이자 위대한 전사로 오랫동안 기억돼 왔다. 수많은 괴물과 신을 마주하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의 여정은 대표적인 영웅 서사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는 익숙한 영웅담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다. 신들의 화려한 이야기를 앞세우거나 오디세우스의 위대한 업적을 찬양하는 대신, 승리의 과정에서 발생한 죄와 희생,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조명한다. 영웅의 갑옷을 벗겨낸 자리에 남은 것은 완벽한 영웅이 아닌, 자신이 내린 선택의 결과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 인간이다.
[헬레네를 내세운 전쟁, 그 뒤에 숨은 욕망]
영화에서 가장 먼저 기존의 신화적 이미지와 달라지는 인물은 헬레네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헬레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이자 '그녀 때문에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다'는 이미지로 소비돼 왔다. 하지만 영화 속 헬레네는 얼굴에는 큰 상처가 남아 있는 등 기존의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그 이유가 드러난다. 헬레네는 전쟁의 원인이라기보다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된 존재에 가깝다. 그 이면에는 한 여인을 둘러싼 사랑이나 아름다움이라기보다, 무역항과 패권을 차지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실제로 전쟁을 선택하고 이익을 좇은 사람들은 따로 있지만, 그 책임은 헬레네라는 한 사람에게 덧씌워진 것이다.
[트로이의 목마… 승리 뒤에 남은 것은 '죄책감'이었다]
트로이의 목마 역시 익숙한 영웅담과는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다. 기존의 서사에서 목마는 오디세우스의 뛰어난 지략과 승리를 상징하는 장치다. 그러나 영화는 그 화려한 전략의 이면을 비춘다.
안티노오스의 병역 기피로 대신 전쟁에 끌려간 시논의 이야기를 통해, 영웅의 승리 뒤에는 이름조차 제대로 남지 못한 이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목마는 단순한 승리의 상징이 아니다. 누군가의 희생과 거짓말 위에 세워진 승리였다는 점에서 오디세우스가 짊어져야 할 죄의 흔적이기도 하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내린 선택의 결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승리한 영웅으로 기억되는 것과 달리, 영화 속 그는 자신이 만든 희생과 선택을 끊임없이 마주하며 죄책감에 시달린다.
[무너진 제우스의 법, '크세니아(Xenia)']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고대 그리스의 불문율인 '크세니아(Xenia, 환대의 법)'다. 낯선 손님을 환대하고, 손님은 그 신뢰를 악용하지 않는다는 이 신성한 신뢰의 질서는 트로이의 목마라는 기만 속에서 먼저 무너졌다. 트로이인들이 선물에 대한 믿음으로 목마를 받아들이자, 오디세우스는 그 신뢰를 역으로 이용해 적을 성 안으로 들여보낸다.
크세니아가 무너지는 모습은 외눈박이 거인의 동굴에서도 반복된다. 손님을 환대하기는커녕 감금하고 병사들을 잡아먹는 거인의 폭력은 크세니아의 질서를 정면으로 무너뜨린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규범을 어긴 것은 거인만이 아니다. 오디세우스와 병사들 역시 동굴에 들어와 주인의 허락 없이 치즈를 먹으며 손님으로서 지켜야 할 선을 넘었다. 영화는 이처럼 어느 한쪽을 완전한 가해자나 피해자로 그리지 않는다. 결국 이 여정은 영웅의 찬란한 귀환이 아니라, 신뢰가 무너진 자리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욕망과 감정, 그리고 그 선택이 남긴 대가를 쫓는 씁쓸한 기록에 가깝다.
['환대'를 잃어가는 시대,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
현대사회에서 낯선 사람을 신뢰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온라인에서는 익명성을 이용한 혐오가 발생하고, 경쟁과 효율을 중시하는 과정에서 타인의 희생이 쉽게 가려지기도 한다. 서로가 정해진 규칙을 지킬 것이라는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 개인을 넘어 공동체의 신뢰 역시 함께 흔들린다.
<오디세이>가 보여주는 인간의 죄는 거창한 악행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타인의 신뢰를 이용하는 것,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자신의 선택이 남긴 결과를 외면하는 것 역시 영화가 보여주는 '죄'의 모습이다.
우리는 타인의 신뢰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에 얼마나 책임지고 있는가. 수천 년 전의 크세니아는 사라진 고대의 규범처럼 보이지만, 서로에 대한 신뢰와 책임이라는 형태로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오디세이>는 영웅의 갑옷을 벗겨낸 자리에 죄책감에 시달리는 한 인간을 세워놓으며,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승리'와 '영웅'의 의미를 다시 묻고 있다.
[매경플러스 프렌즈 1기=세종대 신해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