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만 해도 로맨스 작품 속 ‘악녀’는 착하고 순수한 여주인공을 괴롭히다가, 종국에는 이른바 ‘정의 구현’을 당해 사라짐으로써 선량한 주인공의 정당성을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평면적인 역할에 불과했다. 작품의 팬들 또한 주인공에게 이입하며 악녀를 질타하고 주인공이나 그 주변 인물이 악녀의 모략을 파헤쳐 무너뜨리는 결말에 통쾌함을 느끼고는 했다.
그러나 최근 로맨스 창작물의 판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수동적인 주인공의 도덕성이 강조되는 작품보다, 능동적이고 야망을 숨기지 않아 오히려 전형적인 ‘악녀’에 가까운 주인공이 등장하는 작품이 더욱 각광받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유독 두드러지는 분야가 바로 로맨스판타지, 일명 ‘로판’ 장르이다. 특히 현실의 독자가 파멸이 예정된 소설 속 악녀의 영혼에 빙의하여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의 ‘악녀 빙의물’의 클리셰가 되었고, 이런 클리셰의 웹소설과 웹툰이 인기를 끌며 양산되고 있다.
로맨스판타지는 주로 여성 작가가 창작하고 10~20대 여성 독자들이 소비하는 장르이다. 젊은 여성들이 순진하고 착한 여주인공 대신, 벌을 받아야 할 존재였던 악녀들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생존을 응원하게 된 데에는 어떤 배경이 있을까.
[착하기만 한 여주인공은 이제 답답하다]
그동안 로맨스 장르에서 여성 등장인물은 순종적이고 희생적인 여주인공과, 욕망을 표출한 죄로 벌을 받는 악녀라는 이분법을 바탕으로 묘사되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대부분 세계의 사회는 오랫동안 여성에게 타인을 기쁘게 하고 갈등을 피할 것을 요구해 왔는데, 현대 여성이 보기에 답답하게 느껴지는 선량한 여주인공 역시 이러한 통념이 반영되었다. 아무리 억울한 상황에 처해도 인내하고 순종하며, 누군가 자신을 구원해주길 기다리는 인물상이다.
이러한 여주인공에 대한 묘사는 ‘사랑받으려면 착해야 하고, 욕망이나 야심을 드러내는 여성은 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는데, 최근 여성 독자들의 인식이 변화함에 따라 이러한 구시대적 통념에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독자들은 더 이상 수동적 인물에 공감하지 않는다. 타인의 눈치를 보며 손해를 감수하는 ‘착함’은 현실에서 감정 노동과 불평등으로 귀결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당하면서도 참기만 하는 캐릭터는 대리만족은 커녕 답답함만 유발할 뿐이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로 독자들은 스스로 살길을 모색하고 진취적으로 나아가는 ‘악녀’의 당당함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사랑보다 생존이 먼저다”... 스스로 살 길을 찾는 여주인공들]
소설 빙의물의 주인공은 대부분 자신이 빙의한 캐릭터가 몰락한다는 결말을 미리 알고 있다는 설정이다. 주인공은 현실세계에서 얻은 현대 지식을 활용해 생존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로맨스는 인물의 생존을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즉 사랑의 성취가 목적이었던 과거와 달리, 악녀 빙의물에서는 사회적 성취가 우선되고 로맨스는 그 이후에 따라온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주인공은 대외적 이미지를 다시 쌓고, 역량을 강화하며,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는 데 몰두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주인공들은 무엇보다 자기 욕망에 충실한 존재로 그려진다. 사랑 때문에 강해지는 것이 아닌, ‘강해진 결과로 사랑이 따라온다’는 기존 로맨스 여주인공과 근본적으로 다른 동기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러한 동기 변화는 현대 여성들이 사랑보다 사회적 진출과 커리어를 우선시하게 된 배경에서 시작되었다.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내야 하는 각박한 현대 사회에서, 여성 독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백마 탄 왕자님’이 아니다. 오늘날의 많은 독자들은 자신의 힘으로 사회적 자립을 이뤄내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로판 속 악녀가 자신의 역량을 증명하고 사회적 지위를 쟁취해 나가는 과정에서 ‘사이다’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경쟁에서 연대로, 여성 인물들간의 관계 변화]
또, 주목할만한 요소는, 여성 인물들 사이의 관계성 또한 변화했다는 점이다. 기존 로맨스물의 여성 인물들은 대부분 한 남성을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구도였으며, 이는 은연중 ‘여성들은 본래 서로 질투하고 경쟁하는 존재’라는 편견에 기저한다.
이와 다르게 ‘악녀 빙의물’에는 한때 적대적이었던 두 여성이 서로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친구가 되는 전개가 늘고 있다. 악녀가 사실은 잘못된 정보나 왜곡된 소문의 억울한 피해자였으며, 빙의하게 되는 원작 소설의 본래 여주인공과 악녀가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을 도모하다 결국 연대하게 된다.
여성들 사이의 질투와 경쟁이 당연시되고 오직 남주인공의 ‘총애’를 얻기 위해서만 여성 인물들이 서로 관계 맺을 수 있었던 낡은 각본에서 벗어나, 여성 인물들만의 우정을 보여주는 흐름이 대세가 된 것이다. 가상의 중세시대인 로판 세계관의 가부장적 사회와 모순된 신분 제도 내에서 여성 인물들이 서로 연대하고 의지하는 모습은,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편견에 지친 여성들에게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악녀 빙의가 로판의 대세가 된 이유]
대세가 된 로판의 ‘악녀 빙의’ 클리셰는, 그저 솔직하고 야망 있었을 뿐인데 ‘탐욕스럽고 독한 여자’로 낙인 찍힌 여성 인물의 억울함을 해소 시켜준다.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하고 결국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는 서사는, 노력의 결과가 공정하게 나타나길 바라는 독자들의 기대감을 충족시킨다. 또한, 인간은 자신의 선택을 통해 상황을 통제할 수 있을 때 정서적 안정과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악녀로 빙의한 여주인공은 현대인으로서 다른 인물들보다 앞선 정보를 알고 있다는 설정은 현실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통제력과 우월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전개 구조가 독자들에게 만족스러운 도파민을 제공하는 점도 악녀 빙의물이 흥행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순종하고 자신을 희생하면 사랑 받을 자격을 얻는다는 공식 대신 자신의 힘으로 생존하고 성공을 쟁취하는 인물에게, 그리고 서로를 경쟁자가 아닌 동료로 여기는 여성들의 모습에 독자들은 더 큰 대리만족을 느끼게 되었다. 로판 장르에 악녀에 빙의해 자신의 앞길을 스스로 개척해 가는 주인공들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것은, 여성 독자들이 이제 더 이상 착하기만 한 여주인공에게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 ‘악녀 유행’은 현대 사회의 여성들이 ‘되고 싶은 나’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현상이 아닐까.
[매경플러스 프렌즈 1기=숭실대 김선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