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향후 10년간 재정 200조 원과 기후금융 790조 원 이상, 총 1000조 원 규모를 녹색 전환에 투입한다. 그러나 이 자금이 온실가스를 얼마나 줄일지 가늠할 측정·평가 체계는 아직 갖춰지지 않았다.
정부는 지난 7일 한국형 녹색대전환(K-GX) 전략을 발표했다. 에너지·공급망 위기와 폭염·집중호우 등 기후 리스크가 경제 전반의 부담으로 커진 상황에서, 탄소 감축과 경제성장을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구상이다. 전략은 신성장동력, 모두의 K-GX, 지속가능한 K-GX라는 세 방향으로 짜였다. 기후 대응을 환경 규제가 아닌 산업 경쟁력과 성장동력 확보의 관점에서 접근하겠다는 취지다.
● 5대 다배출 업종 전환 지원…민간 220조 원 투자 계획도
전략의 중심에는 탄소배출이 많은 5대 업종이 있다. 철강·석유화학·시멘트·반도체/디스플레이·정유 업종의 생산 공정을 탈탄소 방식으로 바꾸고, 친환경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을 늘린다는 계획이다. 철강 분야에서는 2030년까지 30만 톤급 수소환원제철 실증 사업을 추진하고, 세계 최초로 양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기업 주도의 'K-GX 시그니처 프로젝트'에는 약 220조 원 규모의 민간 투자가 계획돼 있다.
재원은 두 갈래다. 재정 200조 원과 별도로, 기후금융 790조 원 이상은 산업은행·기업은행·수출입은행·신용보증기금·기술보증기금 등 5대 정책금융기관이 공급한다. 정부는 핵심 품목에 대한 국내생산세액공제와 순환경제 규제특례구역 신설 등 제도 정비도 병행하고, 경제부총리가 주재하는 민관합동 K-GX 협의체에서 이행 상황을 점검할 예정이다.
다만 감축 효과를 어떻게 확인할지는 과제로 남아 있다. 오일영 기후에너지환경부 기후에너지실장은 브리핑에서 기후금융만으로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달성 기여도를 확정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지원 대상을 설계할 때 사업별 감축 효과를 사전에 평가하는 구조는 반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전환 자금 수요 커져…'전환금융' 주목
기후금융은 태양광·풍력 같은 재생에너지 투자는 물론, 기존 산업의 생산 설비를 저탄소 방식으로 바꾸고 관련 기술을 개발하는 데 드는 자금까지 포함한다. 특히 탄소배출이 많은 산업은 공정을 바꾸는 데 상당한 비용이 들고 전환 과정의 불확실성도 커, 금융기관의 자금 공급이 전환의 속도와 범위를 좌우할 수 있다.
그렇다고 탄소배출이 많은 기업에 대한 금융 지원을 일률적으로 줄이는 것이 해법은 아니다. 감축 계획을 고려하지 않고 자금을 줄이면 기업의 감축 투자까지 위축될 수 있고, 반대로 감축 계획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공급하면 실제 배출량 감소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 이에 따라 탄소 다배출 산업이 저탄소 구조로 넘어가도록 돕는 '전환금융'이 주목받고 있다. 이미 친환경 사업을 하는 기업만이 아니라 기존 산업의 생산 방식과 에너지 사용 구조를 바꾸는 데 쓰인다는 점이 특징이다.
정부도 한국형 전환금융 도입과 기후금융 정보 인프라 고도화를 추진할 방침이다. 다만 자금을 어떤 기준으로 배분할지 정하는 전환금융 운영 기준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일본은 2023년부터 2032년까지 10년간 20조 엔 규모의 GX경제이행채를 발행해 기업의 전환 투자를 먼저 지원하고, 이를 마중물로 150조 엔 규모의 민관 투자를 끌어낸다는 목표를 세웠다. 한국도 규모뿐 아니라 자금 배분의 기준과 성과 관리 체계를 얼마나 촘촘히 설계하느냐가 관건이다.
● 금융기관도 대출·투자의 탄소배출량 살펴야
금융기관이 기후 위험을 관리하려면 자금을 공급한 기업의 배출량을 파악해야 하고, 이때 쓰이는 지표가 '금융배출량'이다. 대출·투자에 연결된 온실가스 배출량을 뜻하며, 이를 통해 금융기관은 자신이 공급한 자금이 어떤 산업의 배출 활동과 이어져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국제적으로는 PCAF(탄소회계금융협회) 기준이 널리 활용된다. 대출·투자 대상 기업의 배출량과 자금 제공 비중 등을 바탕으로 산정하는 방식이다.
지난 9월 보도에 따르면 한국산업은행의 화석연료 관련 여신 잔액은 2025년 말 기준 약 9조4533억 원에 달하지만, 금융배출량은 아직 산출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산정에는 자금을 받은 기업의 배출량 자료가 필요한데, 기업별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으면 계산이 어렵기 때문이다. 790조 원을 공급할 주체가 정책금융기관이라는 점에서, 자금과 연결된 배출량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만 금융배출량을 측정하는 것과 탄소배출이 많은 기업의 대출을 제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금융배출량은 배출 연계 규모를 파악하는 지표일 뿐 대출 승인 기준이 아니다. 측정한 정보를 바탕으로 기업의 기후 위험과 전환 계획을 어떻게 평가하고 금융 의사결정에 반영하느냐가 관건이다.
● 지속가능성 공시, 금융 의사결정의 정보 기반
기업의 배출량 데이터를 확보하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은 지속가능성 공시다. 기업이 기후 관련 위험과 기회,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 목표와 대응 계획을 투자자와 금융기관에 공개하는 제도로, 국내에서는 올해 제도화 방안이 확정됐다.
지난 7월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최종안에 따르면 지속가능성 공시는 사업보고서에 포함되는 법정 공시로 편입된다. 국제지속가능성공시기준(ISSB)을 토대로 한 국내 기준(KSSB)에 따라 2028년(2027 회계연도)부터 연결자산 10조 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에 우선 적용되고, 2029년 5조 원, 2030년 2조 원 이상 기업으로 순차 확대된다. 제3자 인증은 2030년부터 단계적으로 도입되며, 공급망 전반의 배출량인 Scope3 공시는 대상별로 3년간 유예된다.
이런 정보가 쌓이면 금융기관은 기업의 현재 배출량뿐 아니라 기후변화가 사업에 미칠 영향과 대응 수준까지 함께 살펴볼 수 있다. 다만 공시가 확대된다고 해서 실질적인 탄소 감축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기업별 자료의 정확성과 비교 가능성이 확보돼야 하고, 공개된 감축 목표가 실제 투자와 배출량 감소로 이어지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공시는 판단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수단일 뿐, 이를 금융기관이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남은 과제다.
● 자금 규모보다 중요한 것은 성과 관리
결국 기후금융의 성과는 공급 규모만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자금이 어떤 산업과 기업에 배분됐는지, 지원받은 기업이 실제로 배출량을 줄였는지, 전환 계획이 투자로 이어졌는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 이를 가늠할 첫 지표는 연말쯤 나올 전망이다. 정부는 5대 업종의 감축 경로를 담은 업종별 GX 로드맵을 연말께 발표할 예정이다.
기후금융 확대가 본격화하면서 금융기관에는 자금 공급을 넘어 기업의 전환 가능성을 평가하고 감축 성과를 점검하는 역할이 요구된다. 앞으로 기후금융의 성패는 얼마나 많은 돈이 투입되는지를 넘어, 그 자금이 산업의 변화를 얼마나 이끌어내는지에 달려 있다.
[매일경제 서포터즈 18기=이화여대 원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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