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SNS 타임라인엔 낯선 장면이 자꾸 걸린다. 화면 속은 분명 아바타들이 뛰노는 로블록스 월드인데 아바타를 조종하는 손의 주인은 20~30대 어른들이다.
로블록스는 이용자가 직접 게임과 콘텐츠를 만들고 다른 이용자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온라인 게임 플랫폼이다. 실제로 지난 8월부터 인스타그램과 X에는 20~30대가 올린 로블록스 플레이 영상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조회수 100만 회는 기본이고 200만 회를 넘긴 영상도 잇따랐다.
이들이 향하는 곳은 흔히 떠올리는 점프맵이나 장애물 코스만이 아니다. 최근 SNS에서 '로블록스 클럽'으로 통하는 공간은 '미드나이트 플라자(Midnight Plaza)'라는 이름의 실제 맵이다. 사용법은 간단하다. 춤추고 있는 다른 캐릭터를 클릭한 뒤 '싱크' 버튼을 누르면 그 춤을 그대로 따라 출 수 있다. SNS에는 "오늘 금요일이라 그런지 클럽 물이 좋다", "8~9시 이후에 스근하게 와서 즐기는 걸 추천한다"는 등 실제 클럽 후기를 방불케 하는 게시물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금요일 밤 약속 장소가 홍대·강남이 아니라 미드나이트 플라자인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는 일시적 해프닝이 아니다. 올해 1분기 로블록스의 글로벌 일일 활성 사용자(DAU) 1억3200만 명 가운데 18세 이상 이용자는 27%를 차지했고, 로블록스 본사의 2분기 실적에서도 매출이 전년 대비 36% 증가한 16억 달러를 기록했다. 어릴 적 로블록스를 하던 세대가 어른이 되어 돌아오면서 회사 입장에서도 놓칠 수 없는 소비층이 된 셈이다.
'초통령 게임'이라 불리던 놀이터에 갑자기 어른들이 몰린 이유, 그리고 그 뒤에 숨은 씁쓸한 경제 사정을 따라가 봤다.
● 왜 하필 로블록스였나
사실 2030이 '동심'으로 회귀하는 흐름은 로블록스가 처음이 아니다. 올해 초부터 문구완구거리를 뒤흔든 촉감완구 '말랑이'와 '왁뿌볼'이 먼저였다. 말랑이는 폴리우레탄 폼으로 만든 부드러운 촉감 장난감을 통칭하고, 왁뿌볼은 점토로 만든 공을 얇은 왁스로 코팅해 눌렀을 때 깨지는 소리와 촉감을 즐기는 제품이다. 쇼핑 플랫폼 지그재그 기준 지난 6월 왁뿌볼 검색량은 1월 대비 약 64배, 거래액은 약 51배 폭증했고, 말랑이 검색량도 9배 가까이 늘었다.
이 열기가 로블록스로 옮겨붙은 연결고리는 명확하다. 말랑이·왁뿌볼이 부서질 때 나는 소리와 촉감을 그대로 구현한 ASMR 맵이 게임 안에 등장해 SNS 알고리즘을 타기 시작한 것이다. 궁금해서 한번 눌러본 어른들이 예상보다 다양한 게임 종류에 눌러앉으면서 '말랑이 유행템'이던 로블록스가 '취미 공간', 나아가 '클럽'으로까지 자리를 바꿨다.
로블록스가 다른 게임과 다른 지점은 구조에 있다. 완성된 하나의 게임을 파는 게 아니라 이용자가 직접 맵과 콘텐츠를 만들어 올리고 다른 이용자가 이를 즐기는 '게임판 유튜브'에 가깝다. 그래서 유행이 게임으로 만들어지는 속도가 밈이 도는 속도와 거의 같다. 온라인에서 화제가 된 밈이든, 말랑이의 촉감이든, 금요일 밤 클럽이든 누군가 곧바로 플레이 가능한 맵으로 구현해버린다.
여기에 '추억'이라는 낮은 진입장벽까지 더해진다. 학창시절 로블록스를 접했던 세대에게는 새삼 배울 게 없는 익숙한 놀이터인 데다 끊임없이 갱신되는 이용자제작콘텐츠(UGC)가 재방문할 이유를 계속 만들어준다. 인플루언서의 영상을 보고 게임에 접속한 이용자가 캐릭터 굿즈를 사고 팝업스토어까지 찾아가는 흐름이 만들어지는 이유다.
● 2030은 왜 자꾸 '애들 놀이'로 돌아갈까
이 회귀 현상은 단순한 노스탤지어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몇 가지 경제 지표를 나란히 놓아보면 다른 그림이 보인다.
① 저비용 즉각적 힐링에 대한 갈증이다. 말랑이·왁뿌볼이 인기를 끈 배경에는 반복적으로 누르고 주무르는 손동작이 교감신경 흥분을 가라앉히고, 부교감신경을 활성화해 안정감을 준다는 전문가 설명과 함께 1만원 이하의 저렴한 가격으로 고물가 시대에 큰돈 들이지 않고 확실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 꼽힌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뜻하는 '소확행'은 원래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에서 나온 표현으로, 2018년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가 그해 우리 사회 10대 소비 트렌드 중 하나로 꼽으며 국내에 자리 잡았다. 말랑이도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로블록스 맵도 이 소확행 소비의 최신 버전인 셈이다.
② 사라지는 술자리다. 예전 같으면 스트레스는 회식 2차, 3차로 풀었지만 요즘 2030은 다르다. 질병관리청 국민건강통계에 따르면 20대 음주율은 2020년 64.4%에서 2024년 63%로, 30대는 같은 기간 69.2%에서 65.3%로 떨어져 전 연령대 중 가장 가파른 감소세를 보였다. 오픈서베이의 'MZ세대 주류 트렌드 리포트 2026'에서도 최근 1개월 내 2030세대 주류 음용률은 67.2%로, 2024년보다 4.9%포인트 줄었다. 실제 소비 데이터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NH농협은행이 카드 고객 738만 명의 결제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2023년 상반기 일반주점 이용 건수를 100으로 놓으면 올해 상반기 20대는 48에 그쳐 3년 새 반토막 났다. 대신 그 자리를 무알코올 음료가 채우고 있다. 국내 무알코올 맥주 시장은 2014년 약 81억원에서 2024년 700억원대로 10년 새 약 9배 성장했다. 술은 줄었지만 '불금'에 어울리고 싶은 마음까지 사라진 건 아니라는 뜻이다. 그 결과 취하기 위해 나가던 진짜 클럽 대신 돈 한 푼 안 들이고 춤과 어울림만 남긴 가상의 클럽으로 옮겨가고 있다.
③ 팍팍해진 청년 고용 시장이다. 국가데이터처의 2026년 8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청년층(15~29세) 고용률은 44.1%로 1년 전보다 1.0%포인트 하락했고, 청년실업률은 5.4%로 0.5%포인트 상승했다. 청년 취업자 수는 46개월째 감소세를 이어가는 중이다.
회식은 줄이고, 야근은 늘고, 취업은 불투명한 시대에 몇 천 원짜리 촉감완구나 이미 익숙한 무료 게임만큼 안전하고 확실한 오락은 드물다. 자기관리와 절약형 소비에 대한 투자는 불확실성이 커진 시대의 새로운 경쟁력으로 여겨지는 분위기다.
● 유행일까, 새로운 소비 패턴일까
시장은 이 신호를 놓치지 않았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키덜트(키즈+어덜트) 시장 규모는 2020년 1조6000억원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되며 향후 최대 11조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저출생으로 정체됐던 완구업계가 2030 덕분에 모처럼 활기를 되찾고 있다는 창신동 상인들의 목소리도 같은 맥락이다. 무신사가 로블록스와 손잡고 팝업스토어를 연 것도 '덕질이 곧 소비'라는 공식이 통계로 증명됐기 때문이다.
2030이 '애들 놀이'로 돌아가는 이 현상은 그리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술자리 대신 러닝을, 회식 대신 무알코올을, 그리고 이제는 값비싼 클럽 대신 미드나이트 플라자를 선택하는 흐름 밑에는 확실한 것 하나 없는 시대에 그나마 확실하게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는 청년 세대의 계산이 깔려 있다.
말랑이를 눌러 터뜨리든, 로블록스 클럽에 접속하든 그 손끝의 선택은 결국 팍팍한 지갑 사정과 맞닿아 있는 셈이다.
[매일경제 서포터즈 18기=숙명여대 우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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