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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금 안 하면 빙하기 온다"… MZ세대가 '가을 날씨'에 진심인 이유

서강대
박새울 서강대 · 18기 서포터즈
2026.09.28

● 삐걱대는 빨간 테이블의 반전… 종로 노포로 몰려든 2030

야외 자리를 즐기는 20대 모습
야외 자리를 즐기는 20대 모습

종로3가의 한쪽 구석, 오래된 구멍가게 앞 골목에는 사람이 넘쳐난다. 쓰러지기 직전인 빛바랜 간판과 휘청거리는 플라스틱 빨간 테이블 앞에는 수십 명의 대기 줄이 늘어선다. 줄을 선 이들의 대부분은 MZ세대다. 언뜻 보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이들에게 이곳은 지금 서울에서 가장 뜨거운 ‘핫플’이다.

지나가다 우연히 발길을 들인 것이 아니다. 지갑 사정이 가벼워 가성비를 챙기려 들르는 곳은 더더욱 아니다. 인스타그램에서 ‘서울 야장’, ‘숨은 야장 맛집’을 태그한 숏폼 콘텐츠는 좋아요 수만 개와 공유 수천 개를 가볍게 넘긴다. 몇 시간의 웨이팅조차 당연하게 감수하는 분위기다. 한 유명 바비큐 야장에서는 대기 번호가 1,000번대를 돌파했다는 후기까지 심심찮게 발견된다. 인기 블로그에는 ‘몇 요일 몇 시에 가야 대기 없이 앉을 수 있는지’를 정리한 이른바 ‘웨이팅 공략집’이 넘쳐난다.

실제로 청년층의 일상 음주 소비는 매년 줄어드는 추세지만, 야장으로 유명한 상권 골목만큼은 정반대의 흐름을 보인다. 하이트진로가 주요 상권의 자사 주류 판매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대표적 야장 상권인 을지로·낙원동·한성대 일대의 올해 상반기 소주 판매량은 전년 동기 대비 약 6.5%, 맥주는 약 9.1% 늘었다.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이들조차 시원한 바람이 부는 ‘야장’에서만큼은 잔을 부딪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과거 중장년층 아저씨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노포의 야외 테이블에, 청년 세대는 왜 이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 오마카세 지고 '회크닉' 떴다… 경험의 중심이 된 날씨

인스타에서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은 ‘회크닉’ <@s.umdays>
인스타에서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은 ‘회크닉’ <@s.umdays>

이러한 야외 지향 트렌드는 야장을 넘어 다양한 일상 문화로 뻗어가고 있다. 최근 SNS 피드를 점령한 키워드는 단연 ‘회크닉’이다. 신선한 ‘회’와 나들이를 뜻하는 ‘피크닉’을 합친 신조어다.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직접 떠온 회를 들고 한강 공원 돗자리로 향해 노을을 보며 즐기는 문화다. 한강 피크닉 자체는 익숙하지만, 이들이 즐기는 방식은 과거와 결이 사뭇 다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예약 전쟁을 뚫고 값비싼 고급 일식 오마카세를 방문해 인증샷을 남기는 것이 2030의 대표적인 미식 트렌드였다. 그러나 지금의 청년들은 같은 회를 먹더라도 직접 시장을 찾아 포장하고, 야외에서 돗자리를 펴고 즐기는 ‘경험의 과정 자체’에 더 큰 가치를 둔다.

지난 5월부터 언급되기 시작해 9월 최고 검색량을 기록한 ‘회크닉’ <인스타·네이버 데이터랩>
지난 5월부터 언급되기 시작해 9월 최고 검색량을 기록한 ‘회크닉’ <인스타·네이버 데이터랩>

골목 야장과 한강 회크닉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정제된 고급스러움 대신 선택한 날 것의 분위기, 그리고 바로 ‘날씨’다.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스미는 9월 초, ‘지금이 아니면 1년을 기다려야 한다’라는 계절적 희소성이 바쁜 일상에 갇혀 있던 청년들을 밖으로 불러내고 있다. 실제로 회크닉 영상을 올리는 릴스마다 “지금 안 즐기면 곧바로 빙하기 온다”라는 멘트가 밈처럼 유행하고 있다.

● 찰나의 가을, 기후위기 시대가 낳은 '계절의 희소성'

특정 계절만의 경험을 특히 선호하는 2030 <트렌드모니터>
특정 계절만의 경험을 특히 선호하는 2030 <트렌드모니터>

스쳐 지나가는 계절의 한 조각일 뿐인데, 이들은 왜 새로운 신조어를 만들어내면서까지 날씨에 집착하는 것일까? 이 해답의 밑바탕에는 환경적 변화가 낳은 불안함이 자리한다.

지구 온난화와 기후변화의 여파를 피부로 체감하며 자란 첫 세대인 이들에게, 봄과 가을처럼 야외 활동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시기는 점점 짧아지고 귀해졌다.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4.9%가 “특정 계절에만 즐길 수 있는 경험들을 일부러 찾아 즐기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답했다. 특히 20대(64.5%)와 30대(60.5%)의 응답률은 전 연령대 중 압도적으로 높았다. 청년층에게 쾌적한 가을 날씨는 이제 당연히 주어지는 배경이 아니라, 한정된 기간에만 소비할 수 있는 ‘희소성 높은 시즌 한정 콘텐츠’로 자리 잡은 것이다.

● 박탈감 없는 포모(FOMO)… 소소한 오늘의 낭만을 전파하다

주목할 점은 이번 트렌드가 과거 SNS를 뒤덮었던 전형적인 ‘포모(FOMO, 유행에서 소외될까 두려워하는 고립 공포)’ 현상과는 다른 온도를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서 유행했던 수십만 원짜리 오마카세, 값비싼 워터 페스티벌, 5성급 호텔 호캉스 열풍은 타인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무리해서 지갑을 열게 만들고, 보는 이에게는 자산 격차와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주곤 했다. 반면 야장과 회크닉에는 유행을 쫓는 데서 오는 피로감이나 위화감이 없다. 큰돈을 들여 특별한 하루를 과시하는 대신, 시장에서 사 온 안주와 편의점 캔맥주 하나로 지금 머리 위에 쏟아지는 바람과 햇볕을 여유롭게 누리는 일상을 나눈다.

SNS에 올라오는 타인의 야장 사진은 독자를 조급하게 옥죄지 않는다. 오히려 각박한 일상에 치여 모니터만 바라보던 이들에게 “오늘 퇴근길에는 나도 잠깐 밖으로 나가 숨을 돌려볼까?” 하는 기분 좋은 용기를 건넨다. 타인과의 비교를 부추기던 과시의 공간이,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오늘의 계절을 소소하게 향유하는 공유의 장으로 변화한 셈이다.

찬 바람이 불어오면 금세 닫혀버릴 이 짧은 계절, 거리의 빨간 플라스틱 테이블에 둘러앉은 청년들의 모습은 지친 일상에 건네는 가장 건강하고 다정한 쉼표다.

[매일경제 서포터즈 18기=서강대 박새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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